유료화 시절, 레벨 20을 찍으면 그때부터 유료였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당연히 내지 못한다. 용돈도 적고(아예 없기도 하고), 무엇보다 '오락에 돈을 쓴다는 것'을 부모님들이 허락하지 않으니까.

정액비가 없는 친구들은 종종 넥슨PC방에 가서 게임을 돌리는 방법이 있었으나...

PC방에 갈 여력도 없고(초등학교에서 PC방을 금지시키고, 이용할 경우 벌점을 주는 경우도 당시에는 허다했음)

갈 용기도 없고(당시에는 PC방에 불량배들만 있다는 인식도 강했음. 한량/백수/건달 등등... 금연석도 없던 때)

갈 돈도 없던 수많은 초등학생들은 레벨 19까지만 키우며 살아야 했다.

당연히 레벨이 적으니까 놀만한 곳도 적다.

기껏해야 곰굴. 그나마 돼지굴은 레벨 19로는 단독 솔플도 힘든 편이다(주술사 제외).

산돼지(흰색) 숲돼지(분홍색)

고구려 기준으로 비영사천문 동쪽을 기준으로 동문 내부에서 아래로 쭉 내려오면 사냥터가 하나 있다.

이곳이 바람의나라 무과금 유저들의 꽃. 바로 돼지굴이다.

솔플로 애환을 달래던 전사, 도적들이 쥐굴, 뱀굴, 곰굴을 전전할 무렵

주술사와 도사들은 동동주를 넉넉히 챙기고 돼지굴로 향하였다.

주술사는 레벨6에, 도사는 레벨12에 원거리 공격마법을 배우기 때문이다.

전사와 도적들은 직접 몸을 맞부딪치고 싸우는 근거리 전투에 특화되어 있는 반면,

주술사와 도사들은 마법공격을 하는 원거리 전투에 특화되어 있다.

이 때문에 튀면서 마법공격 날리기, 일명 '히트 앤드 런' 작전으로 돼지굴을 쓸어버리고는 했었다.

그러나 돼지굴은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니다. 까딱 잘못한다면 돼지들에게 4면에서 포위당해, 비영사천문을 채 쓰기도 전에 '덜컥' 소리와 함께 사망하여 아이템을 떨어뜨리는 일이 잦았다. 특히 돼지굴의 경우에는 4굴 이상만 가면 돼지들의 협공으로 죽어나간 시체들이 널려있었다.

필자는 처음에 돼지굴이라고 하길래, 흔히 양돈가에서 사육하는 핑크핑크하고 둔한 돼지들을 모아둔 곳으로 생각했었다. 당시 레벨 15였던 필자는 대지의힘으로 도씨검을 들고 있었는데, 일반 초보자사냥터에서 평민들을 상대로 가오를 잡던 시절이라(도씨검으로 웬만한 초보자사냥터 몹은 1방 나왔음) 당당하게 돼지굴로 발을 딛었다.

막상 들어가니, 둔탱이 같은 돼지들은 보이지 않고 커다란 송곳니를 가진 돼지들이 기다렸다는 듯 필자를 맞이해주었다.

뱀굴에서 들었던 브금도 웅장했으나, 여기에 쫄지 않고 나아갔다.

필자는 도씨검을 들고 판타지 게임에 나오는 용사캐릭터마냥 돼지들을 후려갈겼다. 필자가 웅담을 빨아먹으며 혈전을 벌였음에도 돼지들은 강했다. 결국 산돼지 3마리와 숲돼지 1마리의 공격을 이기지 못한 필자는 결국 죽고 말았다.

필자의 경우에도 쪼랩전사 시절에 웅담 50개를 믿고 돼지굴에 갔다가 죽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사와 도적들은 체력을 밀어줄 도사를 구하면 위험하기 짝이 없는 돼지굴로 향하였다.

유리몸이라고 부를 정도로 체력이 낮아, 까딱하면 죽을 수가 있는 주술사와 도사들은 물론이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돼지굴은 돈이 되기에 그렇다.

돼지굴의 상징인 산돼지고기와 숲돼지고기

돼지굴에 등장하는 산돼지, 숲돼지를 잡으면 각각 산돼지고기와 숲돼지고기가 나왔다.

산돼지고기는 개당 100전, 숲돼지고기는 개당 200전에 푸줏간에 판매가 가능했다.

이걸 팔아서 다들 망또, 드레스를 하나씩 샀을 것이다.
 

산돼지고기와 숲돼지고기는 최대 99개까지 소유할 수가 있던 것으로 생각난다.

그렇게 된다면 산돼지고기 99개로 9900전, 숲돼지고기 99개로 19800전, 합계 29700전을 벌 수가 있다.

지금 기준이면 3만전은 껌값이나 다름이 없으나, 유료화 시절 3만전은 무과금유저들에게 상당히 큰 가치가 있었다.

당시 예식장에서 판매하던 망또, 웨딩드레스의 가격은 1만 5천전. 설빔 1만전. 색색개비 5천~1만전(더 비싼 경우도 있음), 연등 2~3만전, 색깔망또 3~5만전(보라색, 파란색 등등). 바람의나라에서 꾸밈아이템을 사들이기 위해서는 최소 만 단위의 돈이 필요했다. 유료화 시절에는 무과금유저들은 돈벌이 수단이 그리 많지 못했다.

일부 유저들처럼 장사를 통해 차익으로 돈을 버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그건 극소수의 케이스다.

모험을 즐기고 싶은 대다수의 유저들은 돈도 벌고 사냥도 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것이 바로 돼지굴이다.

파란색망또를 갖고 싶던 필자도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필자는 부캐로 주술사를 키웠다.

주술사 부캐 4개를 키워서 4명으로 차례차례 돼지굴을 도는 식으로 돈을 벌었다.

거의 1주일이 넘게 이런 짓을 한 끝에, 필자는 처음으로 10만전이라는 엄청난 돈을 벌어들였다. 전사와 도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돈을 벌어서 파란색망또, 파란색개비, 연등이라는 깔맞춤에 성공하며 만족감을 누렸다. (주술사 부캐들은 레벨 19가 될때까지 부려먹다가 나중에 버렸다.)

이처럼 돼지굴은 무과금유저 중에서 주술사, 도사들이 애용하는 사냥터였다. 그래서 돼지굴에 가면 주술사, 도사들이 득실거렸다. 간혹 20레벨이 넘은 전사와 도적들이 압도적인 체력을 바탕으로 돼지들을 직접 때려잡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런 과금유저들은 종종 주술사, 도사가 멀리서 잡은 돼지들의 고기를 가로채기도 했었다. (필자도 여러번 당했음)

저기 저 빨갱이가 홍돼지다. 어쩐지 색깔이 빨개서 강력해 보였다.

그러나 주술사로 '히트 앤드 런'을 시작하면 어렵지 않게 잡았다.
 

돼지굴9로 들어가면 돼지굴의 보스인 홍돼지가 기다리고 있다.

돼지굴은 자세히 보면 모두 모습이 똑같이 생겼고, 다들 색깔만 다르다.

홍돼지는 다른 돼지들과 똑같이 생긴 주제에 혼자 빨간색이다. 이 홍돼지를 요리조리 피하면서 마법으로 죽이면(혹은 웅담을 빨아먹으면서 전사, 도적으로 직접 때려죽이면) 간혹 가다가 철단도를 떨어뜨리고는 했었다. 당시 대부분의 무과금 전사유저들이 도씨검을 들고다닌 것을 고려할 때, 철단도는 꽤 귀한 것이었다. 물론 무과금레벨로 착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지의 힘'을 받아야만 한 것으로 기억이 난다. (철단도가 레벨제한은 없는 대신에 힘 20 제한인 것으로 기억남.)

철단도는 대장간에 팔 수가 있었는데, 끽해야 400전 남짓이었다. 그래서 철단도의 경우에는 들고 다니던가, 아니면 마법재료로 구하던 사람들에게 몇천전에 팔았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정리하자면

산돼지 : 산돼지고기(100전)

숲돼지 : 숲돼지고기(200전)

홍돼지 : 철단도

이렇게 드랍들을 했었다.

돼지굴은 무과금유저가 사냥할 수가 있는 '사실상 마지막 사냥터'다. 해안가의 두꺼비, 일본게도 도망만 다니면 주술사, 도사로 사냥을 할 수는 있으나 큰 메리트는 없었다. 무엇보다 해안가지역은 방어템을 빵빵하게 입은 지존레벨 전사들이 메크로를 돌리고 있던 터라, 이기기가 힘들었다. (렙16 남짓의 주술사, 도사가 렙99의 전사보다 사냥이 빠를리가 없으니까)

또한 돼지굴에서 쏠쏠하게 돈을 벌 수가 있던 터라, 친구들과 함께 그룹사냥을 가기도 했었다.

필자의 경우 학교친구가 도사를 키우고 있었기에 전사인 필자와 둘이서 함께 사냥을 갔고, 사냥이 끝나고 푸줏간에서 아이템을 팔아버린 뒤에 돈을 나누고는 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있었다.

필자 : 숲돼지고기 다 판다.

푸줏간 : 숲돼지고기를 7000전에 샀습니다.

숲돼지고기를 전부 팔아치운 뒤, 친구에게 절반인 3500전을 건네주었는데... 친구가 갑자기 정색하며 치사하다고 그랬다.

이 친구에게 왜 그러냐고 묻자, 7000전인데 왜 3500전만 주냐는 실로 초딩스러운 불만을 드러낸 것이다. (3500전이 7000전의 절반이라고 생각을 못한 것) 결국 친구에게 계산기로 7000 나누기 2를 해보라고 말한 뒤에야 오해가 풀린 어처구니 없는 헤프닝도 있었다.

돼지굴에서 가끔 보이던 풍경이다.
 

그러나 돼지굴에는 가장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바로 체류다.

돼지굴은 50이 넘는 고렙유저들을 제외하고, 레벨 6이상의 유저들이 출입이 가능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렇기에 멋모르고 돼지굴에 들어간 갓 전직한 초보유저들이 많이 죽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래서 돼지굴 2굴만 가더라도 죽은 유저의 유령과 떨궈진 아이템, 내복차림으로 근처를 서성거리는 초보유저들이 좀 보였다. (대부분 2굴 쯤에서 죽어나간 사람들이 많았다. 호기심 때문에 진입했다가 죽은 듯?)

이때 레벨 30이 넘는 고렙전사들이 나무그늘에 자리잡은 대감마님처럼 저랩유저의 시체 위에 떡 버티고 서있었다. 그거 뺏어봐야 고작해야 푼돈인데, 그 당시에는 푼돈도 소중했던(?) 시절이었다. 혹은 사디스트처럼 저렙유저들을 놀리는 것에 맛이 들렸던 악질변태라서 그럴 수도 있다. 필자는 다행스럽게도 돼지굴에서 체류를 당했던 기억은 없다. (당했는데 까먹었을 수도 있음.)

필자의 기준으로 봤을 때, 초보자들이 진입했다가 죽어나가는 문제를 제외하고는 딱히 문제점은 보이지 않는다.

특히 이곳에서 쏠쏠하게 돈을 벌었기에 돼지굴에 대해 그리 나쁜 기억은 없다.

그러나 돼지굴의 경우에도 격변을 이겨내질 못했다. 바람의나라가 유료화 시절에는 초보자들이 돈을 벌만한 곳이 돼지굴 외에는 마땅치가 않았으나, 바람의나라가 무료화가 된 이후에는 상황이 바뀐 것이다. 당장에 10만전 퀘스트를 달성하고자 경험치가 많은 쥐굴, 뱀굴에 상주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리고 그들은 레벨 20을 찍자마자 환상의 섬으로 가서 10만전 퀘스트를 통해 10만전을 벌어들이고는 했다. 굳이 힘들게 돼지굴에서 사냥할 필요성이 없어진 것이다.

바람의나라에 불어닥친 혁명적인 퀘스트.
 

경험치가 괜찮은 쥐굴, 뱀굴에서 안정적으로 혼자 사냥을 하면서 어떻게든 레벨 20만 채우고 환상의 섬으로 가서 10만전을 벌어들이는 식의 돈벌이가 횡행했다. 게다가 이제는 무료화가 되었기에 갈만한 곳도 늘어났다.

호박은 돼지고기 '따위'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수입이 짭짤했다. 그래서 매크로 문제가 심각했다.

이 외에도 격수(전사, 도적) VS 비격수(주술사, 도사) 간에 호박분쟁이 생기기도 했다.

당연히 비격수가 귀한 시절이라 필자는 모든 호박을 비격수에게 양보했었다.(무료화 이후)
 

레벨을 좀만 더 키우고 사마귀굴과 전갈굴로 가서 호박을 주워먹는 쪽이 돈이 훨씬 되었다.

(호박의 가격은 개당 500전, 진호박의 가격은 개당 750전)

물론 돼지굴을 애용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존재하였으나, 이들도 레벨이 올라가면 다른 곳으로 빠져버렸다.

예전 같았으면 1명이 아이디 10개를 돌려가며 돼지굴을 이용했던 시절에서, 이제는 1명이 아이디 1개로 사냥하다가 빠지는 식으로 평시 상주인원들이 크게 줄어든 것이다. 결국 유료화 시절에도 나름 괜찮던 돼지굴도 쇠퇴의 길로 가게 되었다.

돼지굴도 쥐굴, 뱀굴과 마찬가지로 갑작스러운 환경변화로 쇠퇴하였으나, 사실은 좀 다르다.

무료화 이후에도 쥐굴과 뱀굴에는 각각 초보자들로 바글거렸던 반면, 돼지굴은 상대적으로 이용인원이 적었다.

이건 무료화가 된 이후에 굳이 돼지굴에 상주할 필요가 없고, 돼지굴이 딱히 경쟁력이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돼지굴에서 고생하느니, 쥐굴 뱀굴에서 얼른 레벨 20찍고 10만전 퀘스트로 가버리는 식)

물론 그렇다고 해서 돼지굴이 완전히 망하지는 않았다. 예전처럼 북적거리는 핫플레이스가 아니었을 뿐이지, 그래도 레벨 20을 넘긴 유저들이 많이들 애용했었다. 특히 필자는 무료화시점에서 전사의 렙을 20을 넘긴 뒤에 분노의 돼지학살을 벌이기도 했다. (항상 돼지만 보면 피해다니다가 이때 처음으로 통쾌함을 느꼈다.)

부자는 망해도 3대가 간다는 말이 있다.

돼지굴은 딱 그런 느낌이었다. 예전 같은 중심지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변두리는 아닌 그런 사냥터.

물론 이것도 옛말이며, 바람의나라가 1시간만에 레벨 99를 찍는 시점에서는 쥐굴, 뱀굴과 마찬가지로 사이좋게 망했다.

원래는 이것으로 사냥터 칼럼을 마칠까 했는데, 생각해보니까 초보자사냥터를 다루질 않았다.

5편에서는 짤막하게 초보자사냥터에 대한 것을 써볼까 한다.

처음에는 반쯤 장난으로 아재가 썰 풀듯이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은 글인데,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여기에 공감하시고 의견들을 달아주셔서 필자도 놀랐다. 이 글을 봐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리며, 여러분의 추억도 공유해주셨으면 좋겠다.